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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da da Sorte
"아, 더워...... 카페가 어디 있다는 거야."
대영은 운이 없다. 그것도 너무 없는데, 오늘도 특히나 역시나 더욱 없다.
집에서 챙겨온 커피가 텀블러에서 새는 바람에 에어팟까지 푹 젖더니, 하필 탕비실 공용 커피 머신이 고장. 그래, 여기까지는 넓은 아량으로 그럴 수 있다. 오랜만에 남이 타 주는 커피나 마실까? 하고 긍정 회로 돌리며 회사 1층 카페로 내려왔더니 내 앞에서 디카페인 원두가 다 떨어지는...... 개같은 경우.
마케팅팀 동기가 오전의 불운 소식을 깔깔깔 웃더니 이거 줄까? 하고 본인의 커피를 흔들어댔다. 나 카페인 못 먹는다고 인간아~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더니 옆에 계시던 영업팀 오 대리님이 고개로 창밖을 가르켰다. 아니면 외부 카페 나가 보든지. 그 말에 홀린듯 네이버 지도 앱을 켰다. 외부 카페,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우리 회사의 장점은요, 뷰가 끝내줍니다. 교통 체증도 거의 없어요.혹하지 말아야 했는데...... 여의도나 구디처럼 빌딩 숲이 아닌 탁 트인 자연 친화적인 회사에서 근무를 할 수 있다는 말에 혹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회사의 위치상 면접자들의 편의를 위해 화상 면접을 진행하겠다더니, 면접관의 등 뒤 통창 너머로 보이는 초록색, 파란색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장면에 넋을 잃었더랬지.
무슨 관광 명소도 아니면서 이상하리만치 외진 곳에 떨어진, 뷰 좋고 (평일 한정)교통 체증 없는 회사. 그 덕분에 근처 카페는 죄다 평일 휴무이거나 커피값이 뷰값이라거나. 그래, 이래서 커피를 들고 다녔잖아. 이래서 외부 카페 생각도 안 했잖아, 대영아. 뭐 하냐.
절망에 빠진 대영은 로비 쇼파에 널부러졌다. 포기할까? 하루쯤 커피 없이 살 수 있잖아. 그냥 건강에 좋고 맛도 없는 물이나 마실까? 하고 벌떡 일어난 대영이 자연스럽게 출입구로 향했다. 응, 아니야. 커피 존나 마셔.
대영은 직장인이다. 직장인은 근무 중에 커피 못 참는다. 그게 비록 디카페인이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커피다. 개빡칠 때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흐르는 아아? 절대 못 참지.
네이버 지도 앱에 뜨는 제일 가까운 편의점은 영업 시간도 기재돼 있지 않았다. 장난함? 오늘 운빨을 봤을 때 이 편의점은 폐업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영은 본인의 불운을 시험해 보기라도 하는 듯 이 시원하고 거대한 냉장고 같은 회사를 나섰다.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아직 본격적인 여름은 시작도 안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이른 더위에 털레털레 편의점으로 향하는 대영의 발걸음이 무겁다. 일단 나오기는 했는데, 근데 편의점에 디카페인 커피가 있었던가. 가끔 과장님 심부름으로 담배나 사 봤지, 편의점 커피는 눈길도 준 적 없던 대영은 결국 네이버 창을 열어 '편의점 디카페인 커피'를 입력했다.
불운의 사나이, 김대영. 오늘의 불운은 끝이 아니라는 듯 질질 끌고 온 슬리퍼가 돌부리에 턱 걸리는 순간,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느낌에 눈을 콱 감아 버렸다. 아시발그럼그렇지내가졌다...!! 무릎은 얼마나 까지려나, 제발 발목만 안 나가면 좋겠는데, 바지까지 찢어지는 거 아냐? 하고 닥쳐온 운명을 받아들이려는데—
풀썩.
풀썩? 아무 고통 없는 느낌에 눈을 살살 뜬 대영의 아래가 푹신했다. 그러니까 내가 푹신하게 넘어졌다. 아니다, 뭔가 대영의 아래에 있다. 아니아니, 더 정확히 누군가 대영의 아래에 대신 깔렸다. 여기까지 인지 완료된 대영이 와아악! 고함을 지르며 일어나려는데...... 상대가 더 빨랐다. 그러니까, 대영이 위에 있는 상태에서 그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는 소리.
기껏 몸 던져 구해 주고는 결국 바닥으로 떨어트리는 건 또 뭐지? 순식간에 바닥에 엎어진 대영이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어버버, 하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의 옷을 탁탁 털어 대는 의문의 인간. 아니, 은인. 멍청히 굳은 대영이 고개만 들어 상대를 쳐다봤을 때, 제일 먼저 시선이 꽂힌 건 바로 머리였다. 정확히는 머리카락.
솜사탕 색깔의 잘 빠진 분홍색이다. 넘어진 것도 잊었는지 대영이 와...... 하고 구경을 했다. 본인의 옷에 묻은 흙먼지를 열심히 털어대던 분홍색 은인이 그제서야 바닥에 엎어져 있는 대영을 내려다보며 조곤조곤 중얼거린다. 뭐라는 거지.
"괜찮지? 여기 길이 멧챠 험해서 조심해."
괜찮냐는 것 보니까 나한테 하는 말이 맞겠지? 근데 괜찮냐는 질문도 아니고, 다친 곳 없냐는 걱정도 아니고, 괜찮지라는 확신은 뭐야. 냅다 듣게 된 반말과 일본어 섞인 문장에 대답할 틈도 없이 바로 다시 조곤조곤 공격이 이어졌다. 그리고 불쑥 다가오는 하얀 손.
"커피 사러 가고 있어? 그렇다면 콧치다요."
대영은 뭐에 홀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신원 모르는 이의 얇은 손가락에 얽힌 손을 빼지도 않고 차박차박 뒤따라 걸으면서.
"으아, 시원하다아."
"아메리카노?"
아, 나 디카페인만 마시는데...... 그렇게 조금을 더 걸어 도착한 곳은 회사 밖에 있다던 그 카페였다. 대답도 듣지 않은 신원 미상의 은인은 바 안쪽으로 슥 들어가더니 능숙하게 커피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카페 직원이셨구나. 뭔가...... 영업이랄 건 없지만 되게 자연스러웠네. 저를 끌고 온 하얀 손을 멍하게 쳐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데,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추더니 대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엇, 너무 쳐다봤나. 머슥하게 웃은 대영이 애써 눈길을 돌렸다. 그제서야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카페 내부에 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3층짜리 깔끔한 건물 외관 덕분에 카페 내부는 크고 세련됐겠다~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니, 잠시만. 바깥은 콘크리트 건물인데 내부가 벽돌일 수 있어? 벽 가까이 가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 봤지만 진짜 벽돌이다. 까실까실한 진짜 벽돌. 진짜 벽돌. 특이하네.
벽돌로 이어진 벽 끝에는 불 꺼진 계단이 있었는데, 1층만 카페로 쓰는 건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출입이 통제돼 있다. 사람 모양에 금지 마크가 좀 특이하기는 한데, 뭐 대충 출입 금지라는 뜻이겠지. 이내 반대편 구석에 서 있는 크고 반짝이는 트리를 발견한 대영이 당황했다. 크리스마스 지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 트리? 진짜 특이하네.
알록달록한 장식들과 따뜻한 느낌의 인테리어. 구석 테이블 위 작은 LP 플레이어에서 흐르는 건지 카페에서는 처음 들어 보는 반주가 흐르고 있었다. 오, 노래 좋은데? 바로 LP 플레이어로 가까이 다가갔으나 어떠한 힌트도 없는 까만 LP판이 느릿느릿 돌아가는 중이었다. 휴대 전화를 꺼내 네이버 음악 검색 앱을 구동했지만 세 번이나 실패한 대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가사가 없어서 검색이 어려운가?
다시 고개를 돌리면 파스텔톤의 테이블은 고작 두어개가 전부. 자신이 처음 앉았던 자리만 유일한 바 자리인 모양이다. 테이크아웃 전문인가? 하긴, 그러고 보니 대영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아무도 없다. 그에 비해 직원들이 꽤 많았는데 모두 뭔가를 내리고 있었다. 콜드브루도 하나, 여기. 정성이네.
음? 어라...??
아니, 잠시만. 갈색 원두를 내리면 검은 물이 흘러야 되는 것 아닌가. 왜 투명한 액체가 떨어지는 거임???
대영이 눈을 비비적거렸다. 내가 아침부터 너무너무 피곤해서 뭘 잘못 봤나. 거북이마냥 고개를 쭉 뺀 대영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갔다. 다시 봐도 투명한 액체다. 부담스러운 시선과 인기척이 느껴진 건지 손이 느려지던 한 직원이 별안간 우당탕탕 일어나 두꺼운 금색 실로 된 커튼 끈을 잡아당겼다. 넓었던 바 안쪽이 크고 어두운 색의 커텐으로 가려지더니, 순식간에 대영의 커피를 내리고 있던 직원의 작은 공간만 남았다.
한순간에 시선을 둘 곳을 잃은 대영이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엥. 뭐고. 잘못 봤나? 다시 한 번 눈을 비비적거리며 카페 입구 바 자리로 몸을 돌렸을 때, 대영은 그대로 멈춰섰다. 요상한 호리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가 대영의 아메리카노에 한 방울 똑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기 때문. 다급한 대영의 목소리는 안중에도 없는지 그저 평온하신 직원분은 대영 몫의 커피를 흔들고 있다. 미친 거 아니야? 이상한 사람이었잖아.
"그거...... 그거 뭐예요? 방금 뭐 넣었어요?"
"응? 이거, 대영의 행운?"
진짜로 뭐에 홀린 게 틀림없다. 아니면 지금까지, 그러니까 오늘 하루 모든 것들이 다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방금 있었던 일들만.......
가만히 서서 고개를 흔들던 대영이 본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이내 뺨도 내려쳐 보았지만...... 제 손에는 여전히 얼음 가득한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고, 저 멀리 뒤에서 또 오라는 이상한 사람의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맴돌고, 인사치레로 손을 살짝 흔들자 달그락달그락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정확히 귀에 꽂힌다. 나는 아무런 죄가 없는 그냥 커피야, 하는 것처럼.
느릿느릿 걸으며 방금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던 대영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와, 씨. 점심시간. 내 아직 도시락도 못 먹었는데!! 경보 수준의 걸음으로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휴대 전화 시계를 확인한 대영의 걸음이 다시 느려지더니 곧 멈추고 말았다.
한 시간은 족히 넘었을 줄 알았는데, 시간은 회사를 나섰을 때보다 고작 이십 분이 흘러 있었다. 와, 미치겠네. 소름이 돋은 대영이 팔을 옷에 막 문질렀다.
"와, 진짜 말이 안 되지 않나. 뭔데, 이거."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대영이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본인이 미친 것도 아니고, 꿈도 아니다. 이상한 일. 진짜로 이상한 일. 작열하는 태양을 그대로 받으며 멍하게 앉아 있던 대영이 겨우 다시 일어났다. 이따 퇴근하고 유튜브 찾아보거나 챗지피티한테 물어봐야지.
요상한 마음을 겨우 달랜 대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쑥불쑥 치미는 기묘한 기분을 애써 누르며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다리가 왜 이렇게나 천근만근인지. 아까보다 더 더운 것 같고, 멀리 보이는 회사가 유독 더 멀어 보이고, 목이 너무너무 마르고...... 들고 있던 커피는 마지막에 들어간 이상하고 투명한 액체 때문에 영 찝찝해서 아직 입에도 안 댔다. 그래도 사람 성의가 있는데, 카페에서 멀어질 때쯤 대충 버리려고 했던 아메리카노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 같다. 달그락달그락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 진짜 그냥 커피라니까~ 안 마셔?
응, 진짜 안 마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리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차라리 회사에 있는 맛없는 정수 물을 마시겠다 맹세하며! 마른 입술을 꾹 깨물고 덜렁거리는 슬리퍼를 질질 끌어 회사에 도착했을 때, 대영은 진짜 개개개 크나큰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 네 대 있는 모든 엘레베이터 화면에는 점검 중이라는 단어가 떠 있었고, 본인의 사무실은 9층이었다.
아...... 진짜시발좀!!
이미 그 이상한 사람은 시야에 없는데도 커피는 못 버리겠고, 그렇다고 마시지도 못하겠고. 그러다 밀폐된 비상구 계단을 5층쯤 올라갔을 때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이 커피가 디카페인이든 아니든, 독약을 탔든 행운을 탔든! 지금 내가 딱 말라서 죽겠다고.
급하게 휴대 전화 메모장을 켠 대영이 분노의 타이핑 했다. 오늘 날짜로 시작한 메모장은 이걸 읽을 때쯤이면 내가 죽었다는 소리겠죠 금일 회사 근처에 있는 어떤 카페에서 분홍색 머리를 한 예쁜 사람이 준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거기에는 투명한 액체가 호리병에 어쩌고저쩌고...... 마지막으로 내 재산은 다 사회에 기부하고 내 빚은 형들이 대신 갚아 줘. 미안. 엄마아빠 형아들 사랑해.
꽂혀 있는 핑크색 하트 모양의 빨대를 빼 던져 버리고는 뚜껑을 열어 아메리카노를 원샷. (그리고 바로 빨대는 다시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으나 아무 반응 없음. 뭐야? 그냥 물이었나. 몸 여기저기를 살피고 만져 봤지만 신체적 이상 없음. 뭔 나라의 앨리스마냥 몸이 커졌거나 작아졌거나? 그런 것도 없음. 그냥 맛만 좀 있었다...? 입맛을 쩝쩝 다신 대영이 남은 얼음을 아그작 씹으며 계단을 마저 올랐다. 걱정 많지만 단순한 성격은 이럴 때 좋다.
빈 컵과 꼬깃한 빨대, 한결 시원하고 가벼워진 몸으로 9층 사무실 제 자리까지 온 대영이 숨을 크게 내뱉었다. 일단 죽지는 않았고, 외적인 큰 이상도 없고. 그렇다면 이제 내적인 산이 하나 남았다. 바로 카페인 부작용. 학생 때는 커피를 아무리 마셔도 멀쩡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카페인이 든 음료를 마시면 심장이 두근거리더니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럽고......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라기에 나는 아직 너무 젊다고!! 어디 아픈 거 아니야?! 하고 대영은 호들갑을 떨어댔다. 갑자기 그런 사람들도 있대~ 알러지도 원래 갑자기 생기는 거잖아~ 다시 괜찮아질 수도 있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준 친구들 덕분에 대영도 금방 걱정을 접었고, 그냥 그 이후로는 카페인은 쳐다도 안 봤다. 슬슬 심장이 두근거릴 때가 됐는데...... 이후에 닥쳐올 두통과 복통을 위해 서랍을 뒤져 비상약도 꺼내 두었으나, 대영의 장기는 조용했다. 뭐야? 디카페인이었나.
그리고는 업무 내내 조용했다. 그, 장기만 조용한 게 아니라 진짜로 조용했다. 거래처와 다툴 일도 없었고, 비품이 갑작스럽게 부족해서 멀리까지 급하게 나가서 구매를 해야 된다거나 노트북에 블루 스크린이 뜬다거나...... 거의 매일 발생하는 그런 불행하고도 불운한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영은 정말 오랜만에 평온히 근무했다, 이상하게도.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불운에 대비할 일이 없어 일에 집중도도 높았고, 체력도 남아돌았다. 그리고 그 무운은 칼퇴로 이어졌다. 사무실 문을 같이 나서는 대영을 보고 같은 팀 직원들이 놀라 각자의 방식대로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 시 맞는데.
그럴 지경이니 장본인 대영은 얼마나 믿겨가 안 되겠는가. 지금, 내가, 여섯 시, 칼퇴근. 주차장에 내려왔는데도 여섯 시 십 분. 커피 냄새가 흥건한 가방을 등에 매고 주차장을 걷는 내내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 오늘 진짜로 진짜 뭔가 이상하다니까.
저 멀리 주차장 구석 본인의 차 옆. 누군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어, 분홍 머리. 아까 그 이상한 사람. 어? 아까 그 사람? 내가 이 회사 다니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아니, 애초에 내 차를 어떻게 알고 기다리고 있는 건데. 스토커인가? 진짜로 이제 내가 미쳐 버린 건가? 걷다가 넘어질 뻔한 내가 정신 차리니 이 세계 남자 주인공, 뭐 이런 소설 속 세계관? 온갖 이상한 상상을 하면서도 발걸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가까워질수록 대영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뭐라고 얘기하지. 죄송하지만 비켜 주세요? 내가 왜 죄송해야 돼. 이거 제 차인데요? 너무 만만해 보이려나. 당신 신고할 거야? 그러다 기어코 분홍색의 동그란 정수리와 가까워졌을 때, 대영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너무나 단순하고 보잘것 없었다.
"저기, 뭐 하세요?"
수상하리만치 조용한 주차장에 대영의 목소리가 울리고, 분홍 머리가 고개를 든다. 꽤 오래 기다린 모양인지 눈을 비비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별가루가 흩날리는 것처럼 주변이 반짝이는 건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피곤했던 탓이겠지.
"오늘 어땠어?"
고작 다섯 글자에 대영의 심장이 엄청 빨리 뛰었다. 카페인 부작용이 이제서야? 근데 명치가 아프다거나 두통이 있지는 않은데. 가슴께 셔츠를 꼭 쥘 뿐, 대영이 선뜻 대답을 못 했다.
다 알고 있다는 눈빛. 칭찬해 달라는 듯 꼼질거리는 입꼬리. 대답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이번에는 진짜로 어깨에 반짝이가 떨어졌다. 멍하게 서 있던 대영이 진짜로 홀리기라도 한듯 분홍 머리 앞에 같이 주저앉아 어깨에 쌓인 반짝이를 탁탁 털어 줬다.
"이런 거 흘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요."
"그럼 대영은?"
"전......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을까. 반짝이가 날리면서 대영의 머리와 어깨, 등, 온갖 곳에 안착하고...... 어깨를 터느라 바쁜 대영의 손에 분홍색 머리카락이 살살 감긴다. 뭐, 아까 내 사원증이라도 봤나 보지. 천천히 고개를 드는 분홍 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아, 분홍 머리가 아니라 유우시라고. 이름을 직접 얘기해 준 적은 없지만 이 사람은 유우시다. 올라가는 유우시의 입꼬리를 가만히 보던 대영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냥 사람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더 생각해 봤자 머리만 복잡하다고, 유우시의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말하고 있다. 그건 그래. 알았어, 더 생각하지 말자.
그 이상한 날을 기점으로 대영의 하루는 매일이 이상했다, 유우시와 함께. 따지자면 평온이 더 맞는 거겠다. 평온해서 이상하다고 해도 되는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매일같이 대영을 괴롭히던 불운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는 내 보험금을 노리고 락스를 타나? 싶었다. AI에게 물어봤지만 냉철한 그 녀석은 대영 님과 전혀 어떤 관계 없는 제3자가 어떻게 니 보험금을 어떻게 타냐며 심리 상담 센터 번호를 권유하기도 했었지. 마실 수 있는 행운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어떤 성분이 들어있든 액체는 행운을 일으킬 수 없댄다. 그래, 사실 나도 알고 있기는 해.
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고, 매일 AI와 말도 안 되는 상상에 입씨름을 하면서도, 매일 유우시네 카페로 갔다. 사실 안 가면 그만인데. 내일 또 올 거지? 라던지, 내일은 라떼로 내려 줄게, 라던지. 천성이 착한 대영은 거절하기 힘들었다. (추후 되돌아봤을 때 이 부분은 핑계에 가깝다)
끝도 없는 괴로움의 고리를 끊어 낸 건 늘 그렇듯 제3자의 개입이었다. 이번에도 오 대리님. 요즈음 점심시간마다 왜 그렇게 바쁘냐는 질문에 근처 카페에서 매일 끼니를 떼운다고 했더니 본인도 그 카페 안다면서,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맛집이라나? 정작 카페에서 우리 회사의 그 어떤 사람도 마주치지 못하기는 했지만. 그래, 대리님이 유명하다는데, 뭐.
대영은 이제 집에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챙겨다니지 않는다. 일단 디카페인 원두가 좀 비싸야지. 매일 챙겨 다니는 것도 귀찮고, 텀블러 세척도 번거롭고. 그에 반해 유우시네 카페는 어떤가. 일단 아메리카노이면서 카페인 부작용이 없다. 거기에 가격도 저렴한데 맛까지 있다. 무엇보다 유우시가 직접 내려 주고...... 등등의 갖가지 이유를 대며 거의 매일같이 유우시네 카페로 출근 중이다.
종종 주문하지도 않은 케일청사과 쥬스라거나, ABC 쥬스라거나, 해독 쥬스...... 를 내오며 커피 그만 마시라고 타박은 하지만. 어떤 음료든 빼먹지 않고 매일 넣는 호리병 안의 액체가 아직까지 영 찝찝하기는 하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대영, 무슨 생각 해?"
작게 울리는 미성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크기가 좀 작아진 듯한 호리병은 여전히 유우시의 손에 들려 있다. 아니, 이 사람이 또......
그래도 초반에는 음료 조작이 나름 조심스러웠다. 몰래 숨겨서 넣는다거나, 시럽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넣는다거나, 시선을 돌린 틈에 몰래 넣는다거나?(성공한 적은 드물다) 한 번은 몰래 넣는 데에도 한계를 느낀 건지 갑자기 밖에 저것 좀 보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처음 듣는 데시벨에 놀라 고개를 휙 돌렸더니 창밖 저 멀리 회사 건물만 띨롱 있고. 뭐 하는 거냐고 다시 유우시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 타이밍에 맞춰 투명한 액체가 한 방울 흐른다. 슬로우 모션을 건 것도 아닌데 엄청 느릿하게 똑. 이내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유우시...... 아니, 대체 뭐가 아까운 건데!! 그치만 꽤 귀여웠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노력도 없다. 대영이 군말없이 주는 족족 다 받아마셔서 그런 건지 몰라도...... '이것 봐라 대영 우와아 흐른다 흐른다' 하면서 느릿느릿 고작 한 방울 똑 떨어트리는 게 전부이다. 이것 역시도 귀엽기는 마찬가지다.
"아무것도요. 그거 오늘도 넣어요?"
"응, 이거 대영 행운이라니까. 이제 이거 없으면 너 안 돼."
그리고는 또 뭐가 좋은지 키듀키듀 웃는다. 웃고 있는 건 유우시인데 왜 자꾸 대영의 입꼬리가 간질간질한지. 유우시가 말하는 "이거"는 커피를 얘기하는 걸까? 아니면 투명한 액체? 혹시...... 혹시 본인을 지칭하는 건 아닐지, 까지 도달한 대영이 바 테이블에 머리를 쿵 박았다. 귀 끝이 빨개진 상태로.
아! 깜짜가...!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더니 유우시의 손에 들린 "바나나마라떼" 를 빼앗듯 낚아채 벌컥벌컥 마셨다. 음, 아니. 마시려고 했다. 바나나와 마, 꾸덕한 질감 덕분에 느릿느릿 흐르는 액체. 고개까지 젖혀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마냥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대영의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유우시가 또 키듀키듀. 그 입꼬리에 낚여 대영도 결국 웃고 말았다. 아, 역시 귀여워.
"아, 이거 너무 꾸덕꾸덕해애...."
"꾸덕꾸덕해애."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 하더니, 꾸덕꾸덕이라는 글자에 알 수 없는 음을 허밍하며 유우시가 뒤돌았다. 아마 하트 모양의 스푼을 찾는 거겠지. 가끔 이렇게 꾸덕한 스무디 같은 질감의 음료는 꼭 스푼으로 떠 먹게 했다. 한 방울도 남기면 안 된다나?
삐죽삐죽 솟은 뒷머리와 이리저리 뒤적일 때마다 작게 흩날리는 반짝이. 진짜 뭐 하는 사람일까. 유우시의 정수리 꼭대기부터 웅크린 몸 구석구석, 어쩐지 귀여워 보이는 발 끝까지 훑은 대영이 눈을 꼭 감았다. 아시발방금개변태같았다...... 대영은 이제 인정한다. 내가 어쩌다 저 사람한테 홀렸을까.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떴더니 유우시가 스푼을 꼭 쥐고는 가만히 섰다. 마치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 표정이 제법 비장하다. 웃음을 꼭 감춘 대영이 물었다.
"이따 카페 닫으면 바빠요?"
"카페 닫으면 모가 바빠...... 카페 닫고 안 바쁘지."
"안 바쁘면 저희 집에서 저녁 같이 먹을래요? 음, 왜 저희 집이냐면. 일단 이 주변은 맛집도 없고, 그나마 몇 개 없는 식당들은 다 일찍 문을 닫으니까 밥을 먹으려면,"
"갈래. 먹을래. 같이 가고 싶어."
대영의 구구절절한 변명을 끊고 빠르게 긍정한 유우시가 스푼을 내밀었다. 음, 어..... 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스푼을 받아든 대영이 꾸덕한 라떼를 쾁쾁 입에 밀어넣기 시작했다. 달았다. 그것도 엄청. 정확히 동시에 대영과 유우시가 속으로 됐다와 얏따를 외치느라 둘 사이에는 꽤 긴 정적이 흘렀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내리며 대영이 고민하는 척 뒷머리를 슥슥 쓸었다.
"어, 오늘 그렇게 바쁘진 않으니까요. 퇴근하고 여섯 시 반쯤? 데리러 올게요. 요 앞 대로변에 나와 있으면 돼요. "
대영의 말에 유우시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끄덕. 어쩐지 주변 공기가 조금 후끈해지고, 대영의 귀가 빨개지고, 유우시의 반짝이 가루에 분홍색이 짙게 섞인 것 같았지만...... 이따 있을 저녁 시간에 들뜬 둘이었기에 서로의 큰 변화를 눈치채기 어려웠으리라.
"이따 봐요. 잘 마셨어요."
손수건을 꼭 쥔 유우시가 고개를 또 끄덕끄덕. 카페를 나서는 대영을 보고는 유우시가 손을 흔들흔들. 기어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한 대영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같이 손을 흔들었다. 카페 밖에서 단둘이 만나는 건 처음이라 자꾸 마음이 붕 뜨는 것만 같고, 일에 집중이 하나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어쩐지 오늘따라 유난히 꾸덕했던 "바나나마라떼"가 잔 바닥에 자박히 깔려 반짝이고 있는 것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것처럼.
유우시와 만나기로 했던 그날, 대영은 인적 드문 도로변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나?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대로변에 주저앉아 삼십 분쯤 기다렸을 때 휴대 전화를 꺼내 유우시를 검색한 대영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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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 사람이 생기면 응당 카카오톡 프로필 구경은 기본, 가끔 SNS 염탐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게 기본인 현대 사회에서 연락처조차 모르다니. 근데 그걸 이제 알았다고? 자기 전에도 항상 유우시 생각만 하다가 자면서 어떻게 카톡 하나 보내 볼 생각을 못 했지? 불이 다 꺼진 카페 앞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발걸음이 더욱 안 떨어졌다. 혹시 모른다는 마음으로 두 시간 삼십 분을 더 앉아 있던 대영이 결국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와, 나 세 시간 기다림. 내일 카페에서 만나면 겁나 뭐라고 해야지. 아니다, 일단 연락처부터 물어보고.
"유우시 관뒀냐니까요? 아니, 상관없어요. 지금 괜찮은 건지만 얘기해 주세요. 네?"
대영은 미칠 지경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본인을 보고 환하게 웃어 주던 카페 직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닫고 있다. 유우시라는 이름만 나오면 다들 안절부절이다. 자꾸 채근하는 대영이 귀찮은 건지, 곤란한 건지 직원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조용한 카페 내부, 대영이 카운터에 머리를 처박는 쿵 소리만 크게 울렸다. 친한 직원 하나만 더 만들걸.
인기척에 고개를 획 들자 대영 바로 앞에 서 있던 직원 하나가 커피를 가리킨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대영이 다시 카운터에 머리를 쿵 처박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대영의 정수리와 커피를 번갈아보던 직원이 이내 한숨을 폭 내쉬고는 커피를 싱크대에 버린 후 2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넓은 카페에 대영 혼자다, 유우시 없이. 귀여운 반주가 흐르던 LP 플레이어도 멈춰 있고, 유달리 반짝이던 조명도 오늘은 깜빡거리기 바쁘다. 얼굴을 살짝 돌린 대영의 시선이 트리에 꽂혔다. 저거 유우시가 좋아하던 오너먼트인데, 바닥에 떨어져 있네. 터져나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무시한 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회사로 발길을 옮겼다.
유우시가 사라진 지 정확히 나흘째, 대영은 출근길에 타이어가 터져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는 보험사 직원의 말을 뒤로 하고 급하게 회사에 상황을 알렸더니 일단 출근을 하랜다. 삼십 분을 택시 잡기에 실패한 대영이 따따블을 불러 겨우 택시를 타고 출근했지만, 마침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던 날이라 상사한테 잔뜩 깨졌다. 카센터에 맡긴 대영의 차는 무슨 부품이 없어서 수리까지 일주일이 넘게 걸린다지를 않나,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함에 목을 돌리다 담에 걸리질 않나. 지나가던 사원분이 대영의 의자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부터 발 끝까지 커피로 샤워를 했다. 잘 모르는 분이라 화도 내지 못하고......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며 열두 시만을 기다리던 대영, 셔츠에서 뚝뚝 떨어지는 아메리카노를 흩날리며 유우시가 없는 유우시의 카페로 향했다.
나흘 째 출근 도장을 찍고 있지만 첫 날 이후 눈길도 못 받았다. 그러나 오늘, 어쩐지 대영의 발걸음이 유독 다부지고 밝다. 오늘은 기필코 뭐라도 얻어내리. 안 되면 나 그냥 회사 관두고 여기 죽치고 있지, 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자 직원들의 눈길이 한번에 몰렸다가 이내 꺼진다. 어~ 이런 불편한 분위기 익숙해~
눈에 불을 켜고 카페 구석구석 샅샅히 훑기 시작한 대영은 처음 카페에 왔던 날 수상하게 커텐을 내리던 직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오, 오랜만!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직원의 안절부절한 시선 처리...... 급하게 바에서 사라지려는 직원을 보고 쏜살같이 달려가 소매를 붙들었다. 작게 딸랑이는 소리가 난 것도 같고.
"저 알죠? 제발요. 유우시 무슨 일 있어요? 대체 왜 안 나와요."
대영에게 잡힌 소매를 빼내려고 열심히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 없는 노릇. 직원의 팔다리를 막 흔들자 방울이 딸랑딸랑거리고, 그 소리에 당황했는지 보라색 반짝이 가루가 막 쏟아져 내린다. 놀란 대영이 이내 건수를 잡았다는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어, 선생님. 당황하셨나 봐요. 반짝이 너무 날리는데요? 가만 보니 이거, 와~ 사람 아니시네. 요정이에요? 뭐, 천사? 안 되겠다. 저 그냥 이대로 PD 수첩이랑 그것이 알고 싶다? 아무튼 온갖 방송국에 이 카페 다 찌를게요. 나 유튜브도 올릴 거야. 막 손님들 먹는 음료에 이상한 액체 탄다고. 내가 그거 다 봤거든? 어? 이거 식품 무슨 법 위반이에요. 알아요? 그리고 지금 이거 완......"
눈이 돌았는지 미친듯이 움직이던 입이 딱 멈췄다, 타인의 손에 의해. 익숙한 향수 냄새에 고개를 위로 들자 그대로 오 대리님과 눈이 마주쳤다. 엉? 오 대리님? 왜 여기에? 대영의 의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마에 뭔가, 그 애니메이션에나 나오는 빨간 빡침 표시가 이마에 둥둥 떠 있다. 이제 이런 건 신기하지도 않다. 오히려 처음 보는 오 대리님의 빡친 모습이 더 놀랍다. 진짜 개빡치셨어. 근데 왜?
"김 주임, 지금 뭐 해? 남의 보금자리에서 왜 깽판을 치고 있지."
머리에 물음표가 여러 개 뜬 대영이 눈알만 도로록 굴리는데 진짜 어지간히 빡치신 모양이다. 입을 막고 있는 손도 안 치워 주고는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왜 그렇게 기본 매너가 없냐며, 입이 있으면 대답을 좀 해 보래신다. 순간 울컥한 대영이 조금 격하게 대리님의...... 아니, 오 대리의 손을 떼내고는 씩씩거렸다. 댁이 뭔데. 여기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막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대답이 막히자 오 대리...... 아니? 오 대리는 무슨, 오시온이 먼저 말을 막는다.
"나는 유우시한테 분명 경고했어, 한 달 내내.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회유도 했어. 매뉴얼 다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감행한 건 유우시인데, 여기에서 다른 직원들 괴롭히면 내가 너무 곤란하지. 나도 걔가 다친 것 속상해, 안타깝기도 하고. 근데 우리도 다른 수가 없었어. 진짜 그게 최선이었던 거야."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대영의 표정을 본 시온이 뒤늦게 깨달았다. 아, 이 인간 생각보다 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댁도 회사로 복귀 못 해. 요. 나한테 다 말해 주고 가!! 요."
"야, 씨. 너는 주임이지. 나는 대리라고!!"
이러다 해고당하면 너 죽여 버린다고 시온이 으름장을 놨다. 어, 해고는 안 되지. 잠깐 정신 차린 대영이 급하게 오후 반차를 갈긴 후 다시 시온을 물고 늘어졌고, 결국 바짓가랑이가 질질 끌려 시온도 반반차를 썼다. 시간적 여유가 조금 생기자 시온이 다시 차분해졌다. 궁금한 것 있으면 다 물어보라고 했더니 질문의 시작은 너무나 당연히 유우시 어디 있어요? 였다. 아하니, 귀한 시간 내줬더니 이게 연애질에 날 써먹네. 앞뒤 정황도 없이 유우시부터 찾는 대영에게 딱밤을 놓은 시온은 지갑에 넣어 다니던 낡은 쪽지 하나와, 여기까지 오게 된 장황한 서사를 읊었다.
개체 384#89ㅂ3의 기록물발견 일자: 04.04.05발견자: 오시온
발견 지점: 37.539826, 127.042263 일대
특이사항: 좌측 날개 결손. 발견자 외 전 대상에 강한 거부 반응 발현. 인간 접촉 이력 추정.
시온에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렇다. 여기는 그냥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 행운을 구해다가 제작하는 근본적인 공장 같은 느낌. 여기가 본점, 전국에 지사처럼 몇 개가 있음. 직원들이 내리던 투명한 액체는 특이한 콜드브루가 아니라 행운 원액을 알맞게 희석한 것. 그러니까 유우시가 대영의 음료에 넣던 것도 다 리얼 행운이 맞음. 원래 희석을 해서 써야 되는데 유우시가 법도를 어기고 대영에게 행운 원액 그대로 남용. 그 결과 당연히 유우시 몫의 원액이 부족해짐. 무리해서 원액을 구하던 유우시가...... 죽지는 않고 살짝 다쳐서 회복 중인데 잠에서 깨어나지 않음.
그제야 유우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기묘하던 순간들이, 항상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던 것 모든 것들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시온의 입에서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대영은 제 뺨을 내려쳤다. 그래, 그때부터 지금까지 당연히 꿈은 아니지. 퉁퉁 부어 빨개진 볼을 안쓰럽게 보던 시온이 나지막이 물었다. 너만 괜찮으면 우시 보고 갈래?
2층을 막고 있던 건 관계자 외 출입 금지가 아니라 사람 접근 금지였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 음...... 이 존재들한테는 비슷한 맥락이겠지. 예전에 잠깐 구경했을 때 2층 계단은 이렇게까지 안 높았는데, 3층은 왜 이렇게 높게 있는지. 시온을 따라 한참 올라서던 대영이 3층에 발을 들이자마자 한 대 맞은 듯멍해졌다.
유우시가 떠 있다. 아, 그냥 떠 있는 건 아니고. 따지자면 회복 캡슐? 같은 곳에 있는 느낌. 영화에서만 보던 이상한 유리 구슬 같은 곳에 잠겨 둥둥 떠 있다. 예쁜 눈은 감겨 있고, 등 뒤에 달려 있는 날개는 한 쪽만 남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찢겨진 상태였다. 와중에 이 인간은 날개 모양도, 색깔도 예쁘냐...... 아, 인간 아니지.
"너는 불운이 가득해, 얘 연차로는 감당 불가능한 수준으로. 그런데도 지가 감당하겠다고 나선 거야. 야, 넌 대체 우시를 어떻게 구워삶았냐? 본인이 아픈 것 제일 싫어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늘 무던하던 애가 너랑 관련된 것들에는 죄다 눈이 도는 것 같애."
아까부터 떨리던 손을 겨우 감추던 대영의 눈이 기어코 눈물로 그렁그렁해졌다. 뭐여? 지금 우는 거시여? 당황한 시온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대영의 돌발 행동에 세모 모양으로 바뀐다. 야!!!!
"유우시이이이이...... 어흑, 미안해애애액!!!!!!!"
시온이 말릴 틈도 없이 지보다 더 큰 유리 구슬에 밀착하더니 이내 유우시를 끌어안은...... 모양으로 매달린 대영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와, 아까부터 느꼈지만 목청 진짜 야바이네. 귀를 막고 감탄하던 시온이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하게 대영을 떼어놓으려 애를 썼다. 근데 진짜 애만 썼다. 발을 밟아도, 팔을 깨물어도, 머리카락을 잡아당겨도 대영의 팔이 유리 구슬에 붙은듯 꼼짝을 안 했다. 양손 가득 비품을 들고 다니던 대영의 근육이 잔뜩 성난듯 꿈틀거렸다. 워매, 환장허네. 들썩거리는 구슬에 시온이 슬슬 불안해졌다. 이러다 깨지면 셋 다 끝인데.
"야, 씨. 위험하다고. 나오라고!!"
"으허헉....... 내가 뭐라고오...... 이 바보야!!!!!!"
구슬에서 안 떨어지려는 대영과 그런 대영을 구슬에서 떨어트리려는 시온이 정신없이 엉겼다. 본질을 잃은 채 서로 최대의 힘을 쓰느라 유우시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인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아무도 못 봤다. 시온의 걱정 담긴 놓으라고와 대영의 울음 섞인 싫다고의 고성이 사이좋게 오가던 중간, 개미 똥꾸멍만한 목소리가 틈을 파고들었다.
".......러워."
"니 뭐라 그랬냐."
우느라 아무 말도 못 하던 대영이 억울함에 시온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안 그래도 큰 시온의 눈이 더 커져 있었다, 무언가에 놀란 얼굴로. 영문을 몰라 시온의 눈에 시선이 멈춘 대영은 그 눈동자에 비친 분홍색 머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급하게 유우시가 들어 있는 구슬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시끄러워, 대영. 왜 둘이 안고 있어? 왜?"
분명 구슬 안에 잠겨 있어야 할 유우시가, 어느새 수면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찢겨진 한쪽 날개마저 떨어진 채로.
갑작스럽게 인간이 된 유우시 덕분에 시온만 바빠졌다. 머리를 뜯으며 괴로워하던 시온은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오후 반차 쓰는 거였다며 막 소리를 지르고 괴로워하다가...... 닥쳐온 현실에 순응하기로 한 건지 차분히 대영과 유우시를 앉혀 두고 이 세계의 섭리를 줄줄 읊었다.
본디의 규율은 이렇다. 담당하던 인간이 본인의 행운을 착실하게 받아 별 탈 없이 생을 마치고 나면, 우선 외형부터 인간을 닮아간다. 지금의 유우시처럼 날개가 떨어지고, 몸에서 일던 반짝이가 날리지 않는 식. 그 다음, 행운 원액을 희석하는 교육생에게 본인 몫을 인수인계, 완료되면 시온처럼 반(半)인간이 되는 동시에 관리자의 권한을 얻게 된다. 그렇게 얼마가 될지 모르는 시절을 보내다 반려자를 만나게 되면, 해당 근무지에서 은퇴한다. 기억을 지우고,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남은 삶을 살다가— 끝내 죽음까지 맞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원칙상으로는 유우시의 담당 인간인 내가 무사히 생을 마감해야 유우시도 인간이 되는 건데...... 일단 내가 무사히 생을 마감하기에는 불운의 레벨이 어나더이기도 하고, 물리적인 이유로 유우시의 날개가 없으졌으니 제 본분을 다할 수도 없고, 인간이 되기 전에 반려자를 만나 버린...... 골치 아픈 요소가 쓰리 콤보를 때려 버리는 아주 특이한 케이스였다.
당사자들에게 설명을 끝낸 시온은 시계를 한 번 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빠 죽겠다며 급한 대로 화상 회의를 켜더니 관리자들과 짧고 굵게 이야기를 끝냈다. 어, 사실 회의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거였다. 원래 규율이라는 게 좀 낡아서 고치기도 해야 된다나? (아무래도 반려자를 만나지 못해 반인간으로 오래 남아 있는 시온이 이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듯하다)
혼자 분주한 시온을 유우시가 빤히 쳐다본다, 대영의 팔에 찰싹 붙어서. 어쩐지 잔뜩 서러워진 시온이 나 너희 김대영이한테 관심 없다고 세 번을 얘기했는데도 믿지 않는 눈치다. 머슥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던 대영이 유우시의 귀에 속삭였다. 오 대리님 제 스타일 아니에요 전 유우시가 더 좋아요, 두 문장 모두 시온의 귀에도 꽂혔다.
"시팔, 야! 다 들려. 너도 내 스타일 아니라고오."
"그런데 왜 둘이 안고 있었는데? 응?"
파스텔톤 테이블에 이마를 처박은 시온이 답답한지 가슴팍을 막 쳤다. 또 되돌이표. 아오, 미친거!! 둘 다 그냥 다시 죽일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온의 손목에서 애플워치가 울기 시작했다. 타이밍 야바이네, 진짜. 시온은 아까 곱게 풀어 뒀던 넥타이를 다시 맸다.
"지지고 볶든가 말든가 알아서 하시고. 김대영 니는 3층에 물 튄 것 꼭 다 닦아라!! 여섯 시 퇴근 찍고 나가, 유우시. 그리고 김대영 몫 행운도 어디 뒀는지 기억해내. 알았어? 인간 됐다고 예외 없다."
인간이다. 유우시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인간이다!! 유우시가 시온의 뒷모습에 인사하는 사이, 대영은 테이블 아래로 본인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어 봤으나 여전히 아팠다. 음, 다행스럽게도 꿈 아니네. 본인의 어깨에 기대 있는 유우시는 더 이상 분홍 머리가 아니었다. 그냥 조금 밝아진 갈색 정도? 확실히 자연스럽고, 다분히 인간적인. 조심스럽게 유우시의 머리를 쓸어 보았지만 반짝이 가루도 날리지 않는다.
"음? 나니?"
"이렇게 바로 머리 색이 바뀌는 것도 신기하고...... 그, 반짝이 가루가 없어서."
"그래서 아쉬워?"
뭐,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다. 분홍색 솜사탕 색깔의 머리는 유우시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느꼈으니까. 그리고 아까 잠깐 봤지만 (충격의 연속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달고 있던 날개가 바로 떨어진 것도 아쉽고, 파란색 분홍색 섞인 반짝이 가루도 팡팡 날릴 때마다 귀여웠는데. 긍정도 부정도 못하고 있는 대영의 속마음을 읽은 건지, 이내 유우시의 얼굴이 장난끼 가득해진다.
"떨어진 날개라도 찾아다가 너 줄까?"
"으아, 됐어요!! 뭐 기념이라고."
대영과 유우시의 뒤로 그 날개를 옮기던 직원들이 흠칫, 멈췄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장난이겠지? 장난일 거야, 유우시에게만 들리게 쫑알쫑알거림은 덤이었다. 대영의 어깨에서 일어나 쇼파에 몸을 폭 기댄 유우시가 눈을 살짝 감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대영, 내일 무슨 날인지 알아?"
"내일 주말이에요. 왜요? 유우시, 있죠. 제가 생각을 좀 해 봤는,"
"형."
"네?"
"형이라고 부르라고. 나 인간이니까 대영보다 형이야."
참 나. 방금 인간이 된 주제에 이 무슨 꼰대 마인드인가. 어이없어진 대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진짜 형인지는 이따 오 대리님한테 차근차근 다시 물어보면 되니까...... 그때까지 장단이나 좀 맞춰 줄까.
"네, 형. 그래서 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유우...... 형이 이제 인간이면 앞으로 갈 곳이 없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대영."
대답 없이 들려오는 본인의 이름에 대영이 좀 쫄았다. 사실 개수작이 (많이) 섞여 있었거든.
"네?"
"나 참을성이 진짜 없어."
"네에....... 기억해 둘게요.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미리 줄래, 생일 선물. 못 기다리겠어."
생일 선물. 그렇다. 대영이 유우시의 행방불명으로 정신 없이 보낸 시간이 어느덧 흘러흘러 대영의 생일까지 성큼 다가온 것이다. 아니, 이 사람이. 내 생일은 또 어떻게 알았냐고....... 아직 가끔 무서워. 엉엉. 당황한 대영은 안중에도 없는 듯 유우시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본인의 날개와 흡사하게 생긴 작은 키링을 건넸다. 그리고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조곤조곤 고백과도 같은 문장을 내뱉었다.
"떨어진 내 일생에, 네 일생의 행운을 모두 담았어. 무겁게 간직해 줘."
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대영을 본 유우시가 키듀키듀 웃었다. 바보. 울보. 달래려는 듯 유우시가 대영을 안았지만, 글쎄...... 꼴은 꼭 유우시가 안긴 폼이었다. 결국 유우시를 품에 안고 한바탕 눈물바다를 만들어 낸 대영이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고백을 답변했다.
"형이 내 평생을 위하니까 나도 꼭 그렇게 할게. 유우시가 내 평생이야."
부둥부둥 서로를 얼싸안은 뒤로 직원들이 하나둘 근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게, 방울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시온과 약속한 여섯 시를 훌쩍 넘긴 카페는 불이 꺼질 생각이 없는 듯 혼자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쩌어 멀리 혼자 남아 야근 중인 오시온 대리만 부글부글 끓었다.
후문a. 시온이 기억해내라던 대영 몫의 행운을 유우시가 냅다 몰빵하여 키링으로 만든 덕분에...... 유우시와 시온은 시말서와 경위서를 썼다.b. 유우시는 자연스럽게 대영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 커피를 잘 내리는 유우시였기에 매일을 기대했지만, 다 카페빨이었는지 유우시는 그저 대영의 출근길 배웅과 퇴근길 마중만을 담당하고 있다.b-1. 가끔 대영의 출근길에 실려가 카페에 행차하시는데, 그렇게 간섭이 장난 아니라고.
b-2. 연애 좀 시작했다고 시온의 연애사까지 고나리질 시작하셨다.c. 시온이 유우시를 발견한 날짜를 기준으로 생년월일을 지정하기 때문에, 유우시는 대영보다 형이 맞았다. 이 사실에 대영은 매우 아쉬워했다.
